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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디자인역사: 바로크 Baroque (1)

디자인 Design/디자인

by tamm 2021. 2. 23.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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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

 

이전 글을 통해 디자인의 기원부터 르네상스에 대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 디자인의 기원: tammist.tistory.com/34

- 비잔틴: tammist.tistory.com/36

- 로마네스크: tammist.tistory.com/37

- 고딕: tammist.tistory.com/38

- 르네상스: tammist.tistory.com/39

 

이번 글에서는 바로크 양식에 대해 알아보자. 내용이 길어 글을 나누어 올릴 예정이다. 

 

 

바로크 (프랑스어: Baroque, Baroque, 이탈리아어: Barocco, 독일어: Barock)는 서양 예술사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용어이자 예술 사조의 한 유형이기도 하다. 

 

어원은 ‘일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pérola barroc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barocco라는 이탈리아어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는데, 뜻은 왜곡된 삼단논법, 혹은 불협화음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소리를 의미한다. 언제나 새로운 사조들은 이전 사조의 전성기에 대한 반발로 이루어지는데 르네상스의 질서에 반발하는 듯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바로크의 예술적 표현 양식은 르네상스 이후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미술, 음악, 건축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양식의 변천에 따라 바로크의 시대는 전기, 중기 그리고 후기로 나뉘지만, 후기 바로크 시대는 곧 로코코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볼 수 있다.

 


바로크 양식의 배경

바로크 양식은 종교개혁으로 인해 약화된 지상의 가치, 인간이 지닌 감정, 상상력 등에 대한 가치를 반종교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였다. 또한,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으로 인한 정치 체계의 변화를 가장 큰 배경으로 들 수 있다. 

수공업과 상업에 바탕을 둔 부르주아들이 과거 귀족들의 경제적 수준에 버금가는 부를 이루었고, 이들이 절대 군주를 지지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바로크 예술 형태를 권력의 상징으로 간주하였다. 

 

Architecture Trevi Fountain Art Baroque Fountain Image by Pexels from Pixabay


바로크 회화

바로크 미술은 역동적인 형태를 포착하는 것과,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대화시키는 데에 중점을 둔다. 흔히 바로크 미술의 시작 지점은 로마이고, 최초의 바로크 미술가는 카라바조라고 간주되고 있다.

 

미술사에서 바로크는 미술의 모든 장르와 하나의 시대를 한꺼번에 포함하는 마지막 양식이다. 바로크 이후로 미술사에서는 동시대에 여러 가지 미술 사조가 등장하며, 각각의 장르에 따라 서로 다른 양식을 보이기도 한다.

 

그럼 바로크 회화에서 가장 주요한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바로크 양식을 보도록 하자.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3.9.29~1610.7.18

카라바조는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의 화가이다. 태어난 마을의 이름인 카라바조(Caravaggio)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삶은 불가사의하고 매혹적이며 위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1600년 로마 미술계에 갑자기 등단했다. 그 이후 그는 어떠한 수입이나 후원자도 없었으나 그는 극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다가 1606년 5월 29일 테니스 경기 도중 말다툼 끝에 상대인 젊은 남자를 살해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현상금이 걸린 채 로마를 도망쳐 나왔다. 이후에도 1608년 몰타에서 말다툼에, 1609년에 나폴리에서 또 다른 말다툼에 개입되었다. 이듬 해인 1610년에 그의 10여 년간의 활동을 뒤로한 채 포르토 에콜레(Porto Ecole)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그의 인생과도 닮은 강한 명암의 대비로 극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1602-3 Caravaggio,Supper at Emmaus National Gallery, London.jpg 출처: 구글 이미지

아래 그림 <승리자 아모르>는 어두운 독수리 날개를 단 로마 큐피드 Amor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다른 화가들이 그린 큐피드에 비해 매우 개성적이며 굉장히 살아있는 듯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갈색머리에 독수리 날개를 가진 큐피드라니! 인상적이다. 

Caravaggio - Amor Vincit Omnia - Google Art Project.jpg 출처: 구글 이미지

 

Caravaggio - Medusa - Google Art Project.jpg 출처: 구글 이미지

 

사실적인 묘사와 극적인 빛과 어둠의 대비가 드라마틱하게 표현된 <일곱 가지 자비로운 행동>이다. 그림은 나폴리의 Pio della Misericordia 교회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여전히 보관 중이라고 한다. 극적인 사람들의 포즈와 빛의 흐름이 인상적인 이 그림은 자세히 살펴볼 수록 당황스러운 면들을 찾아낼 수 있다.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The Seven Works of Mercy-Caravaggio (1607).jpg

아래 그림은 로마 신화에 나오는 포도주의 신 바쿠스를 그린 그림이다. 현재 피렌체의 우피치 갤러리에서 보관하고 있다. 사실적인 묘사로 인해 그림 속 바쿠스가 직접 술잔을 내미는 듯하다. 

Baco, por Caravaggio.jpg 출처: 구글 이미지 

 


페테르  파울 루벤스 | Peter Paul Rubens, 1577.6.28~1640.5.30

루벤스는 독일 태생으로 17세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벨기에 화가이다. 루벤스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는 역동성, 강한 색감, 그리고 관능미를 추구하는 환상적인 바로크 스타일의 대표적인 화가이기도 했다.

 

루벤스는 초상화, 풍경화, 신화나 사실을 바탕으로 그린 역사화, 그리고 교회 제단을 위해 그린 반종교개혁적인 세 폭 제단화인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라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루벤스는 유럽 전역의 여러 귀족과 미술품 수집가에게 유명했던 안트베르펜의 화실을 운영했으며, 그는 인문학자이자 미술품 수집가, 스페인의 펠리페 4세와 잉글랜드의 찰스 1세에게 기사 칭호를 부여받은 외교관이었다.

 

아래 그림 <The Elevation of the Cross>은 루벤스가 바로크 양식을 시도한 초기의 그림이다. 배경은 어둡고 불안하지만 예수의 몸은 고전적인 고결함으로 대비된다. 

 

Peter Paul Rubens - De kruisoprichting.JPG 출처: 구글 이미지 

원래는 아래처럼 연결된 그림이라고 한다. 종교는 없으나 직접 보고싶은 그림이다. 

The Raising of the Cross 출처: 구글 이미지 

 

Peter Paul Rubens Peter Paul Rubens - The Artist and His First Wife, Isabella Brant, in the Honeysuckle Bower.jpg 출처: 구글 이미지 

나이가 좀 있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애니메이션 [플란더스의 개]에서 주인공 소년 네로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그림이 아래 있는 그림이고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바로 루벤스이다. 

 

[플란더스의 개]는 원래 영국 소설가가 쓴 아동 문학이었다. 배경이 되는 플란데런 또는 플랑드르라고 하는 벨기에의 작은 마을로 플랑드르를 중심으로 활동한 예술가들과 작품을 플랑드르파라고 지칭할 만큼 예술에 조예가 깊은 예술가들의 도시라고 한다. 그런 곳에서 화가는 가장 존경받는 위치였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네로에게 루벤스는 이상향 그 자체였을 것 같다. 

 

Peter Paul Rubens,  The Descent from the Cross , ca. 1612-1614, Cathedral of Our Lady, Antwerp, Belgium.

 


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 | Rembrant Harmenszoon van Rijn, 1606.7.15~1669.10.4

렘브란트는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이다. 빛의 화가라고도 불리는 그는 일반적으로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판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특히 네덜란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이기도 하다.

 

예술 분야에서 그의 기여는 역사가들이 소위 네덜란드 황금시대라고 부르는 시대를 불러오게 하였다. 또한 렘브란트는 색채 및 명암의 대조를 통해 빛의 효과를 주어 근대적 명암의 시조로 불리게 된다. 

 

벨기에의 루벤스와 함께 17세기 최고의 화가로 손꼽히는 그는 자화상을 많이 남겼고, <마리아의 죽음> 등 많은 걸작을 남겼다. 

렘브란트의 자화상 출처: 구글 이미지

아래 그림은 [갈릴리 바다의  폭풍] 또는 [갈릴래아 호수의 폭풍]이라는 작품으로 렘브란트가 그린 유일한 바다 풍경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의 구도와 빛의 대비로 인한 극적인 분위기, 그리고 각 인물들이 폭풍 속에서도 안간힘을 쓰며 헤쳐나가려는 노력이 시련 속에서도 버티며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보는 듯하여 무척 인상적인 작품인데, 안타깝게도 1990년 미국 보스튼의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에 전시되었다가 도난당한 그림 중 하나라고 한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A0%98%EB%B8%8C%EB%9E%80%ED%8A%B8#/media/%ED%8C%8C%EC%9D%BC:Rembrandt_Christ_in_the_Storm_on_the_Lake_of_Galilee.jpg

아래 그림은 [돌아온 탕자]로, 렘브란트의 말기 작품 중 하나이다. 성서의 내용을 이미지화한 작품으로 렘브란트의 걸작이다. 부드러운 빛의 표현과 구도를 통해 치유와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한 장의 그림으로 설명한다. 세상을 떠돌다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며 맞아주는 아버지의 늙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과 그런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듯 무릎 꿇고 안긴 아들,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상황을 상상하게 만든다. 모두가 같은 감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지 않음이 이 작품을 감상하는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embrandt_Harmensz._van_Rijn_-_The_Return_of_the_Prodigal_Son.jpg

아래 그림 [야경]은 실제 크기가 437cm x 363cm에 달하는 만큼 엄청난 크기로 압도되는 작품이다. 그리고 렘브란트의 빛이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며 명암대비로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출처: Image by WikiImages from Pixabay  

아래 그림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은 렘브란트의 초기 걸작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이 더 유명한 것은 이 작품 이전에는 늘 그림에 이름 대신 RHL (Rembrandt Harmenszoon of Leiden)이라고 표기했었는데, 이 그림부터 서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더 유명하다. 마치 사진과도 같은 생생한 사람들의 모습과 명암의 대비가 도드라지는 그림이다. 특이한 점은 아무도 해부되고 있는 대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림 안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제각각이라는 것이 무척 묘하게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볼 때면 도대체 렘브란트는 왜 해부학 수업에 대한 그림을 그렸을까 궁금했는데, 특별한 이유는 찾지 못했다. 다만 당시 해부학 수업에 대한 정보만 얻었는데, 그림이 그려질 17세기 당시 해부학 수업은 실제 극장이었던 강의실에서 열리는 1년에 한 번 있는 사교 행사였다고 한다. 학생이나 일반 대중은 입장료만 지불하면 참석할 수 있었다는데 해부는 사형당한 범죄자로 진행되었다고.

 

이런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렘브란트가 이 소재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당시의 해부학 수업에 대한 적나라한 사실의 한 장면인 걸까 하고 생각했지만 렘브란트의 그림은 당시의 실제 해부학 수업과는 달랐다고 한다. 실제로는 내부 장기가 더 빠르게 부패하기 때문에 흉강과 흉부를 열어서 시작한다고 한다. 

출처: Image by  WikiImages  from  Pixabay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3.9.29~1610.7.18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이탈리아의 바로크 화가 중 찾아보기 힘들었던 여성 화가이다. 당시 여성 화가는 커뮤니티에서도 배척당하고 후원자를 구하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의 첫 여성 회원이 되었다니 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의 이런 이력 최초의 여성주의 화가로 평가되기도 한다. 

 

카라바조 화풍의 영향을 받은 후대 화가들 가운데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룬 화가로 평가받는 만큼 그의 그림은 극적이지만 무척 섬세하다. 그의 그림은 유독 여성과 관련된 그림들이 많고 또 굉장히 신선한 시선들이 많은데, 어릴 적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17살에 아버지의 지인이자 화가에게 성폭력을 당했고 그 피해를 신고한 후 법정 공방을 통해 더 큰 상처를 받게 되었고 한다. 그 사건이 작품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의견들이 많다. 

 

<수산나와 두 장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유디트와 하녀>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아래 그림이 <수산나와 두 장로>라는 그림이다. 어린 나이에 그린 그림이었고 여성이었다는 편견 때문에 아버지가 도와준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섬세하며 완성도가 높은 그림이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usanna_and_the_Elders_(1610),_Artemisia_Gentileschi.jpg

 

어머니와 아이라는 작품은 당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심경을 드러내는 듯 어머니의 젖가슴에는 핏자국이 가득하다. 흔히 알고 있는 모성애에 대한 이미지와는 상반된 어머니라 지칭되는 여인의 표정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Gentileschi_-_Mother_and_child.jpg

솔직히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이 작가를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래 작품을 보는 순간 내가 알고 있는 작품을 그린 작가라는 사실에 놀랐다. 아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작품은 기존의 유디트 작품들과 상당히 다른 장면 묘사로 인해 유명한 작품이었다. 

 

처음 그림을 봤을 때 무척 잔인한 장면 묘사에 놀랐었다. 지금 화가의 배경을 듣게 되니까 어쩐지 이해가 되는 장면이다. 유디트를 묘사한 그림 중 가장 잔인하고 강인하지만 평범한 여인으로 표현된 유디트가 아닐까 한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ENTILESCHI_Judith.jpg

아래는 유디트를 표현한 다양한 그림들이다. 무엇하나 자르지 못할 것 같은 성스러운 모습이거나 굉장히 귀족적인 모습의 유디트와 팜므파탈과 같은 유디트의 모습 등 다양한 유디트의 모습들이 보인다. 

출처: wikipedia
출처: wikipedia

그리고 유명한 카라바조의 유디트가 아래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의 유디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와도 같다.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님을 그녀의 얼굴 표정이 말해주고 있다. 이 점이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유디트와 카라바조 유디트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위에 있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일을 한다. 

 

다양한 유디트 그림들과 함께 비교해 보면 다양한 유디트에 대한 이미지를 찾을 수 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Judith_beheading_Holofernes#/media/File:Judith_Beheading_Holofernes-Caravaggio_(c.1598-9).jpg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바로크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다음 글도 작가들의 작품을 보며 바로크 시대의 미술 양식에 대해 이어가겠다. 

 

 

 

 

 


관련 링크

출처: 도난당한 미술품 13점 www.nyculturebeat.com/index.php?document_srl=3538765&mid=Ar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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